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드워드 1세 (문단 편집) == 여담 == * 에드워드 1세의 시대 이전에는 잉글랜드의 왕족이나 귀족들 대부분이 [[프랑스]]의 왕족들과 혈연관계에 있었으며 사실상 잉글랜드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프랑스인]]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단적인 예로 제3차 십자군 전쟁 당시에 활약했던 사자심왕 [[리처드 1세]]만 해도 잉글랜드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재위 10년 동안 잉글랜드에는 단 6개월 정도만 머물렀으며, [[영어]]는 능숙하지 못했고 주로 [[프랑스어]]를 구사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 때에 이르러서는 [[존 왕|프랑스에 어느 정도 존재하던 잉글랜드 소유의 봉토가 크게 줄었으며]] 자연히 잉글랜드의 왕족들과 귀족들도 점차 [[현지화]]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부터 잉글랜드의 귀족과 왕족도 프랑스어를 멀리하고 [[영어]]를 가까이하기 시작했으며 에드워드 1세 본인도 프랑스어보다 영어를 더 유창하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장 이 사람의 이름부터가 [[노르만 정복]] 이후로 처음으로 사용된 게르만계 고유어 이름이다.''' * 가정사는 불우한 편이다.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첫 번째 아내 레오노르를 일찍 잃었는데, 당시 에드워드 1세는 너무도 깊은 슬픔에 잠겨서 한동안 일을 손에 잡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레오노르는 에드워드와 10대 중반에 결혼해 40대가 될 때까지 무려 16명(4남 12녀)의 아이를 낳아주었으며, 전쟁터에도 남편을 따라나섰고 에드워드가 이슬람 자객의 독검에 중독되었을 때도 간호해 준 충실한 아내였다. 사망 이유는 평생에 걸친 다산과 노산(43세 출산)의 후유증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저 16명 중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에드워드 2세를 포함해 5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대부분 갓난아기일 때 죽었다. 레오노르의 사후 맞아들인 두 번째 아내는 [[필리프 3세]]의 딸 프랑스의 마르그리트로, 그녀와의 사이에서 노포크 백작 브로더튼의 토머스와 켄트 백작 우드스톡의 에드먼드를 낳았다.[* 이 중 에드먼드의 딸이 에드워드 1세의 증손자 [[흑태자 에드워드]]의 아내 [[켄트의 조앤]]이다. 즉, 흑태자는 [[근친혼|자신의 당고모(아버지의 친사촌누이)와 결혼한 것]]이다.] 마르그리트는 에드워드 1세의 사후에도 11년을 더 살다 세상을 떠났다. * 1284년, 45세가 되어서야 후계자인 [[에드워드 2세]]를 얻었으나, 에드워드 2세는 아버지와는 성격차가 심해서 부자간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못하였다. 에드워드 2세가 세자 시절에 친구인 가베스턴을 지나치게 감싸고 돌자 분노하여 아들의 머리채를 붙잡고 손찌검을 하고는 가베스턴을 잉글랜드에서 추방하기까지 하였다.[* 가베스턴은 에드워드 2세와는 어릴 적부터 죽을 때까지 절친한 친구 사이였는데, 그 사이가 너무도 가까워서 그가 마법을 걸어 에드워드 2세를 조종한다거나 혹은 서로 동성연인 관계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에드워드 2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즉위한 후에 추방당했던 가베스턴을 다시 불러들여 곁에 두고 다녔다. 그러나 가베스턴은 국왕의 최측근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국정을 엉망으로 하여 귀족들의 증오를 받았고 나중에 그를 증오하던 귀족들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 금욕적인 성격으로 음식을 절제했고 물 외에 다른 음료는 마시지 않았다. * 비록 냉철하고 현실주의적인 성격이었다고는 하지만 의외의 사실이 있다면, 에드워드 1세가 평생 동안 [[십자군 전쟁]]에 대단히 집착했다는 점이다. 이는 에드워드 1세 또한 중세시대 유럽인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1세는 이미 태자 시절에 8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였으나, 함께 원정길에 올랐던 프랑스의 성왕 [[루이 9세]]가 병사하고 에드워드 본인도 자객에게 죽을 뻔하는 등의 악재에 부딪혀 큰 소득 없이 돌아와야 했다. 에드워드 1세는 이를 '''평생의 한'''으로 여겼고, 틈만 나면 중동으로 돌아가 다시 십자군 전쟁을 치르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잉글랜드의 왕으로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었기 때문에 그 소원은 평생토록 미루게 되었다. 기사적 공명심에 불타서 국내 현안을 제쳐두고 십자군 원정을 떠났던 큰할아버지 [[리처드 1세]]와 대비되는 점. * 실책이 많았던 아버지 [[헨리 3세]]가 이 사람을 아들로 둠으로써 그나마 평가를 만회하는 반면, 에드워드 1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2세]]는 [[호부견자]]의 표본을 보여주었고 부왕이 쌓아올린 업적을 죄다 갉아 먹었다고 손가락질받고 있다. 에드워드 2세는 부왕에 비해 확실히 왕으로서의 카리스마와 능력이 뒤쳐졌으며, 결국 [[로버트 1세]]와의 싸움에서도 패배하여 [[스코틀랜드]]의 지배권을 빼앗겨 버렸다. 결국 에드워드 2세가 [[프랑스의 이자벨|프랑스 공주 출신의 아내]]에게 살해당하고 권력을 빼앗기는 바람에 그녀가 데려온 프랑스 출신 가신들의 손아귀에 잉글랜드가 놀아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3세]]가 이들을 무찔러 다시 잉글랜드의 왕권을 바로 잡았다. 사실 아들 에드워드 2세보다 [[격세유전|손자인 에드워드 3세가 더욱 에드워드 1세를 닮은 면]]이 있다. 용맹하게 대외 정책을 수행했으며, 영국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강화시켰다. * 이전에 에드워드 왕이 셋이나 있었지만([[대 에드워드]], [[순교왕 에드워드]], [[참회왕 에드워드]]) 그는 에드워드 4세가 아니라 1세가 되었다. 그 이유는 옛 에드워드 왕들의 시대에는 잉글랜드에 넘버링 문화가 없었기 때문. 넘버링 문화는 노르만족이 가져온 것이다. 넘버링 문화가 없던 시절의 왕이라도 후대의 왕실에서 그걸 고려해서 왕호를 정할 수도 있지만,[* 현재 북유럽 국가들이 그렇다. 바이킹 혹은 초기 북유럽 기독교 시대에는 넘버링을 안 썼는데, 후대 왕들이 그 시대의 옛 왕들을 고려해서 넘버링을 이어서 썼다.] 노르만족은 웨식스 왕조의 잉글랜드에 딱히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넘버링을 새로 시작했다.[* 왕실을 포함해 초기 노르만 지배층은 잉글랜드를 자기들이 책임지고 다스리는 백성과 영토가 아니라, 그냥 식민지(...)쯤으로 생각했다. 후대의 잉글랜드인이 아일랜드에 대해 가졌던 생각과 비슷하다.] * 자신이 [[싸이코패스]]라고 커밍아웃한 뇌신경학자인 [[제임스 팰런]]이 에드워드 1세의 먼 후손이라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